사인하는 날

결정은 생각보다 빨리 했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을 했다기보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동안 계속 계산만 했다.

  • 지금 안 팔면 더 떨어질 수도 있음
  • 근데 오를 수도 있음
  • 팔면 6천 손해 확정
  • 대신 대출 일부 갚고 이자 줄일 수 있음
  • 스트레스 줄어듦
  • 대신 6천은 돌아오지 않음

계속 계산하다가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답 없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중개사에게 전화했다.

“…사장님.”

“네.”

“…2억 2천에 팔게요.”

잠깐 정적이 흐르고 중개사가 말했다.

“네, 잘 결정하셨습니다. 요즘 시장에서는 나쁜 가격 아닙니다.”

또 그 말이었다.

나쁜 가격은 아닙니다.

나는 이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계약서 쓰는 날

계약서 쓰는 날, 회사에 반차를 냈다.

이상하게 회사에는
“집 팔러 갑니다”
이 말을 못 하겠더라.

뭔가 실패하러 가는 느낌이었다.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매수자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나보다 어려 보였다.

신혼부부 같았다.

남자가 말했다.

“집 잘 보고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손해 보고 파는 집인데
저 사람들은 기분 좋아서 사는 집이었다.

같은 집인데
누구는 웃고
누구는 손해 보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중개사가 말했다.

“자, 그럼 계약서 작성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읽는데
글자가 잘 안 보였다.

매매가: 220,000,000원

그 숫자를 한참 보고 있었다.

내가 이 집 처음 샀을 때 가격이 생각났다.

그때는 좋았는데.

도장 찍는 순간, 손이 떨렸다.

진짜로 떨렸다.

중개사가 말했다.

“여기, 여기, 여기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나는 도장을 찍었다.



도장 찍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내 6천만 원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집 비우는 날

계약하고 한 달 뒤, 집을 비우러 갔다.

이사 갈 때는 몰랐는데
집 뺄 때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짐 다 빠진 집에 혼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거실
못 자국 남은 벽
냉장고 자리 자국
침대 자리 자국

여기서 진짜 몇 년 살았는데.

좋은 일도 있었고
싸운 날도 있었고
처음으로 돈 모아서 산 집이었고

나는 그냥 한참 서 있었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기서 우리 처음으로 1억 모은 거 기억나?”

“…응.”

“그때 우리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리 망한 거 아니지?”

나는 바로 대답했다.

“…아니야. 안 망했어.”

그리고 말했다.

“돈 좀 잃은 거지, 인생 잃은 건 아니야.”

그 말하면서도
솔직히 나 스스로한테 하는 말 같았다.


몇 달 뒤

빌라 팔고 나서
대출 일부 갚았다.

이자가 줄었다.

매달 260 내던 이자가
190으로 줄었다.

그거 하나로도 숨이 좀 쉬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
그때부터 부부 싸움이 거의 없어졌다.

어느 날 아내가 그랬다.

“이상하다. 빌라 팔았다고 부자 된 것도 아닌데 왜 마음이 편하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폭탄 하나 버리고 온 느낌이라 그런가 보지.”

진짜 그 느낌이었다.

손해는 봤는데
폭탄은 정리한 느낌.


그리고 더 웃긴 건

빌라 팔고 6개월 뒤였다.

부동산 앱을 보는데
익숙한 주소가 보였다.

내가 살던 빌라.

나는 무심코 눌렀다.

매물 가격
2억 5천

나는 한참 동안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내가 판 가격
2억 2천

지금 가격
2억 5천

3천 올랐다.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그냥 핸드폰을 껐다.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냥 웃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네.”

아내가 말했다.

“아니, 인생은 선택이야.”

나는 물었다.

“무슨 선택?”

아내가 말했다.

“망하지 않는 선택.”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했다.

망하지 않는 선택.

그때 처음 알았다.

돈 버는 선택이 아니라
망하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걸.

서울 아파트를 산 남자 시리즈

kal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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